JB칼럼
- 작성자홍보과
- 작성일시201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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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칼럼-해석은 자유
<최태호 / 한국어학과 교수 / 2018년 1월 18일 / 동양일보>
1990년 전후로 기억한다. <시와 시학>이라는 잡지사가 있었다. 편집주간으로 김재홍 교수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 심사위원장이었음)그 사무실에서 농담처럼 주고받으며 이 시에 관해 토론을 했다. 그 중 일부를 기억을 더듬으며 적어보려고 한다. 김재홍 교수님의 의견은 단호했다. <조감도>가 아니고 <오감도>가 맞다는 것이다. 그 당시 현실이 ‘까마귀가 내려다보는 암담한 현실’이기 때문에 일부러 까마귀 오(烏) 자를 썼다고 하셨다. 13인의 아이가 도로를 질주하는 것은 ‘예수가 죽은 날, 즉 13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서양사람들이 불길하게 생각하는 숫자를 일부러 시어로 사용했다고 하였다. 그 해설을 들으면서 <오감도>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막다른 골목 = 꽉 막힌 현실, 무서운 아이 = 일본인, 무서워하는 아이 = 조선인, 무서운 아이는 한 두 명, 무서워하는 아이는 10명, 궁중심리에 무서워 떨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 뚫린 길 = 광복, 해방’ 등으로 해석하면 이 시가 대단히 일제강점기에 저항하는 내용의 시임을 알 수 있다. 그 순간 머리에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느 작품이든지 작가의 창작과 독자의 해석에 따라 사뭇 다른 방향으로 뜻풀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이 시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 ***이 아니라 천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우리는 항상 현실 속에서 버둥거리며 살고 있다. 평창 올림픽에 참가하는 북한의 선수단과 응원단, 중국의 시진핑의 참여 여부 등으로 무수한 해석을 한다. 트럼프와 아베, 그리고 푸틴 등의 힘의 원리를 느끼며 그 중간에서 버거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올림픽이라는 호재를 갖고도 북한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고, 억지로 모셔(?)오려고 애쓰는 현 상황에 슬퍼하는 사람들도 많다. 훗날 오늘의 현실을 무엇이라고 평가할 것인가, 우리의 현실은 항상 힘들게 살아왔다.
자신 있게 세계를 리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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