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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자의 유래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시2005/09/20
  • 조회수1,514
점자의 유래

 

 

이제 좀 쉬었다 가죠.
배우시느라 머리가 좀 아프지 않나요. 머리도 식힐 겸해서
우리가 배우고 있는 점자를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한번 알아보고 지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점자를 사랑하는 우리가 점자의 유래를 모른다면 말이 안되겠죠.
일반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의 글자인 "점자"를 일반 문자인 한글의 모형을 점으로 튀어나오게 하여

손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점자는 그렇지가 않고 그 나름의 체계와 규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면서 아셨겠죠.

 

그러나 점자가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그렇게 하였을 거예요.

점자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정안인들을 통해 여러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지만,

한결같이 정안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만들어 낸 문자였기에,

맹인들이 읽고 쓰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요.

 

맹인들이 읽고 쓰기에 가장 쉬운 글자인 점자를 발명한 사람은

바로 프랑스인인 Braille(브라이유)입니다.

그 역시 어려서 실명을 하게 되었던 사람입니다.
Braille가 점자를 발명하게 된 것은 당시 프랑스의 군 장교였던

Barbier(바루비에)가 발명한 야간 문자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바루비에는 밤에 군사용 메세지를 전달할 목적으로 손가락으로 읽을 수 있는

점으로 된 문자를 생각하였습니다.

바루비에의 야간 문자(Ecriture Nocturne)는 위에서 아래로 6점,

좌우 두 줄로 모두 열 두점으로 구성되었고,

점자 필기도구는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점자판, 점필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바루이에는 맹인들이 그의 야간 문자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1821년 파리 맹학교에서 그 문자를 시범해 보였는데,

이것이 Braille가 점자를 생각해 내개 된 운명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당시 파리맹학교에 재학중이던 Braille는 여러 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가구를 만드는 작업장에서. 어린 브라이유는 송곳을 가지고 놀다가

눈을 다쳐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 일반 학교에 입학하여 브라이유의 영특한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났습니다.

브라이유의 부모님은 그의 영특함에 큰 힘을 얻어

1818년 이른 봄, 파리 맹학원에 입학을 시키게 됩니다.

브라이유가 12세가 되던 이때, 최초의 점자인 ''바루비에'' 점자를 접하게 되었던 거죠.

 

많은 시각장애인들과 브라이유는 이전부터 선(線)문자로 공부를 하면서

많은 불편을 느끼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에 브라이유는 바루비에의 점자를 이용하여 새로운 점자를 고안해냈습니다.

16세 때 그는 우선 자기의 생각대로 바루비에의 12점을 6점으로 줄이기로 했습니다.

가로 2점 세로 6점인 것을 세로 3점으로 줄이기 위해

고무줄로 중간을 묶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선(線)문자는

읽고 쓰는 것이 동시에 안 될 뿐 아니라 체계가 잡혀있지 않고

복잡해서 습득이 불편하였습니다.

그나마 그당시 쓰이던 바루비에의 점자도 점(12점)이 너무 많아

불편할 뿐만 아니라 발음 위주로 철자법을 무시했지요.

 

브라이유의 점자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였습니다.

그러나 학교당국은 브라이유가 체계화한 점자의 사용을 금지하고

선(線)문자나 바루비에의 12점식의 점자 사용을 학생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정안인들의 시각에서 보고 점을 가지고 묵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모양의 글을 만들어 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몰래 브라이유식 점자를 익혔고,

서로에게 보급하고 권장했습니다.

브라이유식은 점의 수가 적어서 간편하고 체계가 잘 짜여져

한 자를 알면 열 자를 알 수 있는 절대적인 장점을 갖고 있었고,

시각장애인들 스스로가 읽고 쓸 수 있다는 것 이 동시에 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에게는 두 눈을 뜬 것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IN-TOP: 0px; MARGIN-BOTTOM: 0px; LINE-HEIGHT: 130%" align=justify>본인이 만든 점자가  우수하다는 것을 대중에게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공개적으로 실행했습니다.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브라이유의 점자를 반대하던

맹학교의 듀화 교장도 브라유 점자 사용을 허락하게 되었고,

브라이유는 1829년 그의 나이 20살 때 그의 논문에 일반 문자뿐만 아니라

수학 기호와 음악 기호 등 문자로 사용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점자화하여 공표하고

1837년에 다시 수정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송곳은 그에게 고통과 좌절을 가져다 주었지만

송곳이 점필로 변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시각장애인에게는

광명을 가져다 주는 도구가 되었지요.

 

결국 점자는 Braille가 죽은 2년 후인 1854년에 파리 맹학교에서

공식 맹인용 문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지금은 우리 나라 말을 비롯하여

거의 다른 모든 언어에도 점자가 사용되게 되었지요.

이는 마치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그 시대 양반층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민중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었으므로 꾸준히 사용되어

결과적으로 오늘에 와서는 한글이 인정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브라이유가 생존할 당시에는 그가 쌓은 공에 비하면

그의 삶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얻은 자리라고는 고작 말단 교사직이었고,

그는 또 유년 시절 맹학원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지병으로 고생했고,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그의 곁에는 상냥한 아내의 손길도 귀여운 자녀도 없었습니다.

브라이유 개인적으로는 암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그와 가장 가까웠던 ''듀코''라는 친구는 그를 평가하기를

"브라이유에게서 점자에 대한 공을 뺀다면 그는 허수아비와도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생존해 있던 시대에는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조국과 세계 각국의 시각장애인에게로부터 추앙을 얻었습니다.

그의 생가는 유적지로 보존되었고,

그 위패는 인류와 조국을 위해서 불후의 업적을 남긴 위인들 중 제일 반열에 모셔졌습니다.

 

그럼 우리 나라에는 언제 점자가 쓰여졌고 누가 발명하였을까요.
우리 나라에서는 1898년에 미국인 선교사 홀의 부인 로제타 여사가

시각장애 여아를 데려다 교육을 시키면서 점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로제타 홀 여사가 도입한 점자는 ''뉴욕포인트''라고 하는데

점이 4개뿐인 4점형 한글점자인 ''조선한맹점자 = 쟝림보는글자''입니다.

하지만 이 4점식 점자는 모음과 자음, 자음은 또 초성과 종성으로 나뉘는

우리 나라 낱말을 표현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당시 지금의 서울맹학교 전신인 제생원의 맹아부 교사였던 박두성 교사가

노학우 씨 등 시각장애인 6명으로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만들어

한글점자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 이 반포되게 된 것입니다.

박두성 선생은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손수 점자를 찍어

한글 점자 보급에 열과 성을 쏟아 부은 나머지

당신께서도 한때 실명의 위기를 맞으시기도 했습니다.

 

11년이 지난 1947년 당시 국립 맹아학교의 이종덕, 전태환 두 교사와 재학생들에 의해

훈맹정음이 한글 맞춤법에 맞추어 수정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많은 부분이 수정, 보완되었고,

1993년에 문화체육부와 LG 복지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한국 점자 연구위원회의 임안수 교수는 9명의 집필위원을 중심으로

1994년 11월 4일 ''한국 점자통일안''의 미비점을 보완한

''개정 한국점자통일안,을 마련하였지요.

그리고 한국 점자 연구위원회는 이를 문화체육부에 공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문화체육부는 이를 받아들여 국가 공인 표준 점자를 제정하고

문화 체육부장관 자문 기구로 ''한국 표준 점자 제정 자문 위원회''를 발족하여

위원회의 안을 토대로 1997년 12월 17일 ''한국 점자 규정''을 고시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고 있듯이

시각장애인들에게는 11월 4일을 "점자 기념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이러한 송암 박두성 선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은상님이 시로 기념한 것입니다.

 

 점자판 구멍마다 피땀 괴인 임의 정성
 어두운 가슴마다에 광명을 던지셨소
 이 아침 천국에서도 같이 웃으시리라
 남의 불행 건지려고 자기 행복 버리신 임
 한숨을 돌이켜서 입마다 노래 소리
 그 공덕 잊으리까 영원한 찬송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