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작성자정승일
- 작성일시2006/10/15
- 조회수683
^골프장에 도착할 때쯤 내린 두 분의 결론은 프로로 변한 왕년의 하수를 한번 혼내주자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어느새 두 사람과 한편이 되어 일주일에 서너 번 라운드 한다는 프로 같은 아마추어를 혼내주는 모의에 동의한 꼴이 되고 말았다.
^골프장 식당에서 첫 대면을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골프를 잘 칠 것 같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내가 그리고 있는 골프를 잘 칠 것 같은 외모란, 몸이 호리호리하고 키는 보통이면서 얼굴을 가무잡잡하게 그을었고 손등과 팔뚝은 검게 그을려 필요한 근육이 적당히 발달된 그런 외모다. 우람하거나 근육질의 체격을 갖고 골프를 잘 치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식당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치는 모습이 역연했는데 나도 그만 그런 분위기에 이끌려 ‘오늘 뭔가 확실히 보여주어야겠구나!’하는 다짐을 하고야 말았다. 뭔가 보여주려 하다간 내가 추락하는 사례를 수없이 겪어 온 터라 ‘이러면 골프 망칠 텐데’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두 분의 모의에 동참한 입장이 되어 있었다.
^첫 홀부터 네 명은 모두 적으로 변해 있었다. 모의과정에선 한 명을 혼내 준다고 얘기가 모아지는 듯했으나 막상 라운드가 시작되니 서로가 모두 세 명을 적으로 삼아 플레이하는 상황으로 변했다. 물론 프로라는 분한테 보이지 않는 이런저런 방해공작이 집중되었으나 그렇다고 결코 돈은 잃지 않겠다는 각오가 대단해보였다.
^예상대로 집중 공격대상이 된 프로라는 분이 절룩거리기 시작했고 나머지 셋의 플레이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홀이 늘어날수록 지나치게 승부에 매달린 나머지 모두의 성적이 영 말이 아니었다. 본래 자기의 호흡대로 자기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붙들고 늘어지기 위한 플레이를 하니 게임이 제대로 풀릴 까닭이 없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타도를 외치는 분위기의 라운드는 꽤 힘들었다. 스코어는 네 명 모두 80대 후반. 한두 타 차이가 있었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스코어였다. 프로라는 분은 70대 초반을 치는 코스에서 80대 후반을 쳤다며 억울해 했고 나머지 두 분은 확실하게 혼을 내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나는 괜히 적대적 게임에 휘말려들어 근래 보기 드문 추한 라운드를 하고 말았다는 자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상대방을 혼내주겠다는 마음의 폭탄은 결국 각자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던 것이다. 아 잊지 못할 라운드여.